접착제 없이 보존하는 법 : 전통 접착술
접착제가 없던 시대, 장인들은 어떻게 물건을 결합했을까?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접착제는 현대의 화학 기술이 만든 편리한 도구이지만, 그 이전의 수백 년 동안 인류는 접착제 없이도 물건을 단단히 결합하고 보존하는 기술을 발전시켜 왔다. 특히 전통 목공예나 서책 제본, 도자기 수리 등의 분야에서는 기계적 연결 구조, 천연 재료, 응축 시간 등을 활용한 고도의 접착술이 사용되었다. 예컨대 한국의 전통 가구 제작에 사용된 짜맞춤 기법은 못이나 본드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견고한 구조를 완성한다. 이는 목재의 수축과 팽창까지 계산해 짜 넣는 매우 정교한 기술이며, 오늘날에도 고급 가구나 문화재 보존에 활용된다.
또 다른 예로, 한지 제본술은 별도의 인공 접착제가 없어도 수백 년간 형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고안된 방식이다. 풀 대신 밀가루풀, 쌀풀 등 천연 접착물질이 사용되었으며, 종이와 종이 사이의 밀착력은 손으로 누르거나 일정한 무게를 활용해 유지되었다. 이렇게 완성된 문서는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더욱 단단해졌으며, 습도와 온도 변화에 덜 민감해 고문서 보존에도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이러한 전통 접착술은 단순히 재료를 붙이는 기술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와 인간의 감각이 만나 탄생한 생태적 지혜라 할 수 있다.
자연에서 얻은 접착력: 생물 기반 전통 접착제의 비밀
전통 사회에서 사용되었던 접착 방식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동물성·식물성 성분을 활용한 생물 기반 접착 기술이다. 대표적인 예로 ‘아교(阿膠)’는 동물의 피부나 뼈를 고아 만든 천연 접착제로, 특히 전통 회화나 족자 보수에 널리 쓰였다. 아교는 수분이 증발하면 자연스럽게 굳으며, 재가열 시에는 다시 연화되어 재사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순환형 접착재로 주목받고 있다. 이처럼 복원성과 친환경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접착 기술은 현대 접착제 산업이 다시 주목하고 있는 전통 기술이기도 하다.
또한 식물성 접착제 중에서는 쌀풀(죽), 밀가루풀, 닥나무즙 등을 활용한 방식이 대표적이다. 특히 한지를 제작할 때 쓰이는 닥풀은 시간이 지나도 종이의 품질을 해치지 않고, 되려 접착 부위를 유연하게 유지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천연 재료는 공예 작품뿐 아니라 의례용품, 가옥 보수, 벽지 제작에도 활용되었다. 그 중에서도 쌀풀은 지금도 일부 장인들이 직접 만들어 쓰며, 손의 감각으로 끓는 온도와 농도를 조절해야만 최상의 접착력을 낼 수 있어 정밀한 기술과 경험이 요구되는 재료로 평가된다.
이처럼 전통 접착술은 단지 ‘붙이는’ 행위를 넘어서 재료 간의 물리적 조화와 시간의 힘을 활용한 응축 기술이라 볼 수 있다. 과거의 장인들은 재료 자체에 집중했고,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접착이 되도록 기다리는 지혜를 실천해왔다. 빠른 결과를 추구하는 현대 사회와는 달리, 자연을 기다리는 태도 자체가 기술의 일부였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대 복원 현장에서 되살아나는 전통 접착술의 가치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전통 접착술이 현대의 문화재 복원 분야에서 재조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서적, 가구, 불상, 도자기 등 역사적 유물을 복원할 때, 화학성분이 강한 접착제를 사용할 경우 오히려 재료의 수명을 단축시키거나 색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 때문에 보존 전문가들은 점차 천연 접착제 또는 비접착 방식의 전통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특히 한국문화재재단과 국립문화재연구원 등 전문 기관에서는 전통 목공 짜맞춤, 아교 혼합 기법, 한지 보수술 등을 실제 복원 과정에 활용하고 있으며, 이를 위한 장인 연계 프로그램과 청년 교육과정도 확대되고 있다.
또한 MZ세대의 감각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전통 접착술은 단순한 과거 기술이 아닌 현대 디자인과 생태 철학이 만나는 교차점으로 자리잡고 있다. 최근에는 이 기술을 응용해 분해·재조립이 가능한 모듈형 가구, 환경친화적 전통 종이 포장재 등이 개발되고 있으며, 디자인 학교나 메이커스페이스에서도 관련 워크숍이 진행 중이다.
결국, 전통 접착술은 사라진 기술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생태적 해답이 될 수 있다. 빠르게 소비되고 쉽게 버려지는 현대 제품들과 달리, 전통 기술은 재료에 대한 존중과 관계의 복원을 바탕으로 한다. 우리 앞에 놓인 접착제 한 통보다, 접착제 없이도 기술과 시간으로 이어지는 오래된 지혜가 더 오래 남는 이유는 그 안에 인간과 자연의 균형이 살아있기 때문이다.